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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세상/일상 그리고 단상

나의 살던 고향은... 나의 고향 마을 '유실'에 관한 추억과 전해 들은 이야기

by 중년엄마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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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 살던 마을의 이름이다. 유실은 그곳에 살았던 일가족 구성원들 모두에게 고향 마을이자 추억이 겹겹이 쌓여 있는 아련한 그리움의 장소이다. 누군가 어딘선가 유실에 대해 기록할지도 모르지만,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딸아이였던 자로서의 기억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곧 있을 도로 공사로 70년 넘은 고향집이 허물어질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하며, 그곳에서 가정과 삶을 일구셨던 나의 부모님께 마음으로 드리는 나의 작은 선물 같은 글을 적어나가 본다.

 

유후공이 살던 마을 '유후실'서 유래, 자손들 700년 터전 지켜


얼마 전 부모님을 뵈러 고향인 유실에 다녀왔다. 대화 중 아버지께서 상기시켜 주시기를 '유실'의 원래 이름은 '유후실'이라고 하셨다. 용인이씨 15대손인 '유휴공이 살던 마을'이었기에 유후실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부르기 편하게 '유실'로 마을 이름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유운 2리에 해당한다. 거기 살던 우리끼리는 언제나 유실로 불렀지만, 어디 가서 말하거나 주소를 적을 때는 유운 2리로 통했다. 참고로, 유운 1리는 송골에 해당한다.

유실이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자연스레 유실이 되었을 것이라고 넘겼던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마을 이름 유래 관련하여 그런 식으로 배웠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명절에 차례 지내러 큰댁에 가면 집안의 뿌리에 대해 자주 얘기해 주시던 큰댁 아저씨의 어느 말씀 속에서 유후공이란 존재감이 스쳐 지나가듯 기억난다.

유후공이 어떤 분이신지까지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는데, 찾아보니 용인이씨 중시조 이중인 할아버지의 둘째 아드님인 이사위(1342~) 할아버지라고 하신다. 이 분은 고려말인 1360년 정몽주, 문익점과 함께 등과 하였으며 당시 최연소자였다고 한다. 고려말인 14세기 유후공이 살던 마을이었던 이곳 유실에서 유후공의 자손들이 그때부터 현재인 21세기까지 무려 700년 가까이 조상들의 터전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었다.

 

용인이씨 명맥 청백리공, 판관공, 장양공, 수사공으로 이어져


유후공의 아드님이신 청백리공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명절이나 제사 때나 집안 모임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집안 친척 어른들로부터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다. 검색해 보니, 청백리공 이백지(1361~1419년, 용인이씨 16대) 할아버지는 고려 우왕 11년인 13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왕조에 들어와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시고 태종 때에 청백리가 되셨다고 한다. 청백리공의 묘소는 포곡읍 가실리 호암미술관 뒤편에 있으며 용인시향토유적 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백리공 할아버지는 아들 5형제를 두셨고, 이 중 셋째 아드님인 17대 판관공 이수상 할아버지가 계시고, 판관공의 8세손인 장양공 이일(용인이씨 23대, 1538~1601년) 장군께서 나의 직계이시다. 장양공은 3형제를 두셨는데, 이 중 둘째 이숭원(용인이씨 24대) 할아버지 자손들은 주로 신원리 일대에 거주하고, 셋째인 이숭의(용인이씨 24대)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유운 2리인 '유실'을 포함하는 유운리에 주로 거주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참고 : 디지털용인문화대전). 또한, 이숭의 할아버지의 넷째 아드님이신 수사공 이견(용인이씨 25대) 할아버지가 나의 직계이다. 유운 1리인 송골에는 이숭의 할아버지의 장남이신 영국공의 자손들이 살고 계신다.

30대부터 37대까지의 묘소가 포곡면 신원리 선산(모현면 초부리 뒷뜰이란 곳 바로 앞에 있어 예전엔 뒷뜰 선산이라 부르셨다고 한다)에 모셔져 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30대 할아버지께서는 강원도 횡성군 '통곡'이라는 곳에서 돌아가셔서 그곳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을 족보에서 보고 아버지를 비롯한 37대 자손들이 주축이 되어 지금의 횡성 새말휴게소 근처 '통곡'이라는 골짜기에까지 직접 찾아가신 적이 있었다. 깊은 골짜기에서는 조선 후기인 약 200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관한 어떤 흔적조차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그 후 신원리 선산 가장 높은 자리에 단비만 세웠다고 하신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곳에 모시고 홀홀단신의 몸으로 고향땅 유실을 힘겹게 찾아오셨을 31대 할아버지의 슬픔과 고단함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5대 독자 후 36대 4남매, 일제강점기 수탈과 고난 겪어


조선 후기인 31대부터 나의 증조할아버지이신 35대까지 5대 독자로 손이 매우 귀해졌다고 한다. 혼인하여 자손이 생기지 않자 독실한 불교신자이셨던 증조할머니께서는 어떤 개울을 건너 멀리 산 속에 있는 절에 자주 가셔서 자손을 보기 위해 열심히 불공을 들이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의 할아버지를 포함한 3남 1녀를 36대에 이르러 두게 되셨다.

나의 할아버지는 이 중 삼남이셨다. 한일합방 이후 본격적인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우리 민족의 뼈아픈 근현대사와 운명을 함께 하셨다. 할머니의 어머니셨던 진외증조 할머니께서 당시 일본놈들이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피하기 위해 얼굴도 보지 않고 근처에 나이 맞는 총각을 찾아 혼인을 서두르셨다고 한다. 할머니 나이 열여덟에 시집왔다고 하셨다. 신혼 생활도 없이 할아버지께서는 이십 대 청년 시절에 강제 징용되어 일제의 비행장 건설을 위해 끌려가 약 6개월 동안 강제 노역을 당하기도 하셨다. 현재 경기도 평택에서 미군 비행장으로 쓰이는 곳이다.

당시 강제 노역 중 배고픔과 질병, 사고, 가혹 행위 등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의 죽음을 목격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워낙 기골이 장대하고 강한 체질이라 아마도 지옥 같았을 그 곳에서 살아남아 돌아오신 거 같다. 당시 할아버지를 유독 괴롭힌 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의 힘을 느끼고는 그 후 더 이상 할아버지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감정 표현이나 말씀이 적으시기도 했고 시대적 형편상 배움이 적으셔서 본인의 경험에 대해 어떤 글로도 남기지 못하셨던 할아버지께서 가끔 약주 한 잔 드셨을 때는 문득 당시 기억을 떠오르시며 "아휴, 일본놈들... (우리를 바라보며) 너희가 어떻게 알겠니?" 하시며 그저 몸서리를 치셨을 뿐이었다. 어떤 트라우마 때문이셨는지 굳이 자세히도 오래도 말씀하진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난 어려서부터 나의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그 일본을 무척 싫어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 양민 학살로 마을 인구 줄어... 피난 후 마을 재건


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청년이 되자마자 곧이어 한국전쟁인 6.25를 겪게 되신다. 1946년생인 나의 아버지는 광복 이듬해에 태어나셨고, 두 살 터울로 1948년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가 태어나셨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 혼인하여 광복 후 안정되어 장남인 나의 아버지를 포함해 1남 1녀를 두셨고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때도 강제 징용되어 끌려가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셨다고 한다.

이듬해인 1951년 1.4 후퇴 당시에 아버지의 나이가 만 4세가 지났는데(당시 기준 음력으로 5세), 모든 일가친척들이 함께 충청북도 청주까지 도보로 피난을 떠나셨다고 한다. 어린 아버지가 다리가 아파 못 걷겠다고 하여 아버지의 동생인 더 어린 나의 고모를 업고 있던 우리 할머니를 대신해 시어머니인 증조할머니께서 아버지를 업어 주시기도 하셨다고 한다.

이 시절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어느 대목에 이르면 할머니께서는 많이, 아주 많이, 가끔 약주를 드신 날엔 밤새도록 흐느껴 우시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아버지 밑에 두 살 터울 여동생인 고모가 피난 중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어 할아버지께서 이름 모를 근처 어느 야산에 묻어주고 오셨다고 한다.

이 일 이후 할머니께서는 이제 하나 남은 아들인 나의 아버지라도 어떻게든 살려야겠다고 생각하시고 타향에서 어느 날은 바가지에 동냥을 하여 먹이셨다고 말씀 하셨다. 이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어렸을 적엔 듣기 싫어 자리를 피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보다 훨씬 어렸던 아기 엄마의 이야기로 여겨지고, 젖먹이 어린 아기를 잃고 남은 아이의 손을 부여잡고 고단했을 피난살이에서 먹을 것을 구했던 너무 어린 엄마였던 나의 할머니가 그저 가엾기만 하다.

당시 피난 가서 일가족이 머물렀던 충청북도 청주의 그 집을 아버지의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수소문해 찾아가 그 댁의 아드님을 만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오신 적도 있다. 아마 내가 용인국민학교 4학년이던 1985년도 여름 즈음의 일이다. 37대인 나의 아버지 세대의 장남들의 경우 유년 시절 한국 전쟁을 겪으신 셈이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 마을 꼭대기 산골짜기 밑에서는 남한 국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서 번갈아 양민 학살이 이루어졌고, 전쟁 이후 유실에선 날마다 한집 건너 제사일 정도로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전후 베이비붐, 농촌 근대화 맞물려 37~38대 대가족 집성촌


나의 아버지 연배 이후의 삼촌들, 고모들, 당숙들, 당고모들은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으신 전후 베이비붐 세대라고 볼 수 있다. 37대의 구성 인원을 살펴 보면 첫째 큰 할아버지댁이 3남 3녀, 둘째 할아버지 댁이 2남 2녀, 나의 할아버지인 셋째 할아버지께서는 4남 2녀를 두셨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타고난 기골이 장대하셨는데, 마을에서 씨름도 잘하셨고, 평생 정직한 농사꾼으로 힘든 농사일도 잘하셨다. 유실 마을 꼭대기에 상징적으로 있는 '유실저수지'를 만드는데 중추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다. 유실저수지는 할아버지의 땀이 녹아있는 곳이다. "저수지 만드느라 너희 할아버지 고생 많이 하셨다. 우리 고생한 거 너희한테 다 말해 뭐 하니..." 하시며 할머니께서 간혹 그 시절에 대해 언급하셨던 기억이 난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농사 지으시던 토지 약 500평을 기부하시기도 했다. 

2023년 2월의 꽁꽁 언 유실 저수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청년 시절 노력과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는 노년기에도 유실의 마을 어른으로 경로당 회장님이자 원로로 존경을 받으셨다. 마을 안에 배고픈 이가 있으면, 본인이 직접 농사지은 곡식이며 고구마며 가져다주셨고, 상을 당하거나 큰 일을 치르는 집이 있으면 쌀 한 포대 등에 지고 가장 먼저 달려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유실 마을에서 언젠가부터 대통령이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려운 이웃들의 부족함을 살피시고 배고픔을 채워주신 할아버지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으시다.

한편, 나의 유년 시절 유실에서 나의 아버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시기로 마을의 청년 이장이셨고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기 경기도 농촌 마을의 변화와 함께 하셨다. 한 때 11명의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유실 고향집은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 안채가 생기고 이후 식구가 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힘을 합쳐 사랑채를 직접 지으셨다고 한다.

안채의 경우 할아버지의 결혼 생활과 함께 70년이 넘었고, 사랑채의 경우 아버지의 결혼을 앞두고 지어져 50년이 넘었다. 안채의 안방에서 삼촌들과 고모들이 태어났고, 안채 작은방에서 언니와 내가 태어났다. 유실 집에서 동생을 품고 만삭의 모습으로 집안 이곳저곳을 바삐 움직이시며 중간에 나를 챙겨주시던 엄마의 모습도 기억난다. 유실 고향집에는 매년 봄에는 최근까지도 제비들이 찾아와 그들의 집을 짓고 대대로 자손을 번성시키고 있어 왔다. 그들 제비 일가에게도 유실은 고향이자 유실집 처가 밑에 있는 여러 채의 제비집은 고향집인 셈이다.

내가 태어난 1970년대 유실은 그야말로 용인이씨 자손들의 집성촌이었다. 나는 용인이씨 38대 손인데, 6촌들이 무척 많았고 어린 시절 내내 이 집 저 집을 내 집처럼 오가며 같이 밥도 자주 먹고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마을 구석구석에서 함께 뛰놀며 지냈다. 해지는 저녁 멀리 서쪽 산 위의 노을을 바라보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장작 타는 연기를 보고는, 집에 갈 시간임을 직감하고 달려가던 꼬마였던 나의 뒷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집 대문에 들어서면 대문간 사랑방 아궁이에서 할머니가 태우시던 솔잎 냄새며, 가마솥에 푹 끓여낸 외양간의 구수한 소여물 냄새가 지금도 맡아지는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의 유년기는 그저 소박했고 다복했고 마치 드라마 전원일기같기도 했고, 영화 반지의 제왕의 호빗마을 같기도 했던 유실이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지낸 따뜻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직전 장남인 아버지께서는 만삭의 어머니와 함께 유실을 떠나 분가하여 용인 읍내에서 자리 잡고 유실과 읍내를 오가며 생활하셨고, 유실에 있는 고향집은 현재까지 그대로 있어 왔다. 이제 도시 계획에 따른 주변 도로 공사로 인해 곧 허물어질 것이다.

이제, 아쉬움은 거둬 내고 그 자리에 그리움을 담아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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